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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양극화: 성령의 유무와 그 결과 - part 3 (노아의 때와 하나님의 율법) 본문

bible study [핵심 진리]

믿음의 양극화: 성령의 유무와 그 결과 - part 3 (노아의 때와 하나님의 율법)

BibleMotivation 2023. 5. 2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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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며, 120년 동안 홍수가 날 것과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A. 시작하는 말

 

(1) 지난 글에서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바로 다음에 말씀하신 "가라지의 비유"와 그 의미에 대하여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가라지의 비유"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말씀을 뿌리는 자(씨앗을 뿌리는 농부)"와 "그 뿌려진 말씀을 받아들이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마음(여러 종류의 밭)"과 결과적으로 얻게 될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이 "밭"을 의미하는 것은 "세상(이 세상에 주신 교회)"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설명하셨으며, 교회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받아들여서 오류를 생성하고 거짓 원칙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항상 존재한다.

 

셋째, 사탄은 자기가 뿌린 악한 씨가 맺은 악한 열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에게 돌리려고 한다. 사탄은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예수님의 품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들여보내서 그들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구원의 사업을 잘못 나타내며 성도들과 새로운 신자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넷째,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마태복음 13장 29~30절).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품성과 행동의 동기를 판단하는 일을 맡기지는 않으셨다. 그것은 심판의 영역이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인간인 우리가 남을 심판할 자격은 없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교회에서 끊어 버리려 하다가는 실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섯째,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본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거짓 주장과 오류가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셔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인간의 구속 사업을 완성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와 사랑을 증명하셨다.

 

(2)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글로써 적어서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이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사랑을 실천하도록 설명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하지만,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임도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3)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의 창조능력과 재창조의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Substantial Entity)가 우리 인간 속에 거하도록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실천할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인간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4)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과 말씀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 성장하도록 훈련해야 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사탄의 모든 시험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현재의 주제인 "믿음의 양극화: 성령의 유무와 그 결과"의 세번째 글로써,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37절부터 39절까지 말씀하신 "노아의 때와 인자의 임하실 때"의 비유를 살펴보면서, 성경이 제시하시는 이 비유의 참된 의미를 알아보며, 현재 우리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B. 노아의 때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반부에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는지, 그리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마태복음 24장 3절)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37절부터,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마지막 때의 교회 안에 두 부류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 두 부류에 관한 이야기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마태복음 24장 37절)"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이 "노아의 때와 인자의 임하실 때"에 대한 글을 자세하게 연구하여 적은 글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여 읽을 수 있다.

*아래의 글은 "노아의 때" 시리즈의 첫번째 글로써, 이 시리즈는 모두 다섯 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으니, 조금 시간을 할애하여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노아의 때 - part 1(feat.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성경연구 #십자가중심의성경 #노아의때 #노아의때란무엇인가 #예수님재림 #재림의징조 #마태복음24장 #죄...

blog.naver.com

 

아래에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마태복음 24장 37절)"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 성경적인 연구를 토대로 열 가지로 요약해 보았다.


 

C. "노아의 때"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 

 

첫째먼저, 이 블로글에서 매우 여러번 강조하여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반으로 접으면, 마치 데칼코마니와 같이 정확하게 둘로 접힌다. 그리고, 그 속의 내용은 모두 첫째 아담이 실패한 그대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성공하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아래의 도표를 참조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노아의 때와 인자의 임하실 때고 역시 아래와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과정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 "노아의 때"와 "인자의 임하실 때"를 비교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명확한 성경적 구조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6장부터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와 바벨탑 사건,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 19절로 시작되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은 서로 동일한 구조이다.


둘째하나님께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창세기 3장에서 죄의 유입 이후에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의 족보와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셋(아벨)의 족보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창세기 6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6장 1~3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셋째, 하나님께서는 셋의 자손들 중에서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를 선택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며, 열심히 주변 사람들에게 홍수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 이외에도 더 구원할 사람들이 없는지 오래참고 기다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넷째,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모두 방주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물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침례 예식"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또한, 사도바울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당시에 홍해를 건너면서 모두 물로 "침례"받았음을 기록한다.

(*참고로, "침례"는 헬라어 "밥티조"인데, "물에 잠기다"라는 의미임. 그렇기 때문에, '세례'가 아니라 "침례"로 표기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음. "세례"는 '물을 뿌리는 것'을 의미하며,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단어임.)

 

[베드로전서 3장 20~21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0장 1~2절]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세례)례를 받고


다섯째,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자식 중에서 의를 따르는 셋(아벨)의 자손이었던 노아의 가족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지만, 반대로, 불순종(죄)을 했던 가인의 자손들은 모두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의인들에게는 물이 "구원하는 표"가 되었지만, 하나님께 반역을 했던 악인들에게 물은 "멸망을 주는 표"가 된 것이었다.(*바로 위에 적어 놓은 성경절 참조) 그리고, 노아의 방주로 시작하여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역의 정점은 "바벨탑 사건(창세기 11장)"이었다.


여섯째, 노아의 방주는 “The Noah’s Ark”라고 부르며(참조: 마태복음 24장 38절/ 누가복음 17장 27절/ 히브리서 11장 7절/ 베드로전서 3장 20절)지성소 안의 법궤는 “The Ark of the Covenant”라고 부른다.(참조: 히브리서 9장 4절/ 요한계시록 11장 19절) 그리고, 이 "Ark"라는 영어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키보토스"인데, 성경책에서 사용한 이 두 단어의 헬라어 원어도 모두 동일하게 “키보토스”이다.

 

성경책에서 사용된 "키보토스"의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무로 만든 상자나 궤(a wooden chest or box; 물건을 넣도록 만든 네모난 그릇), 

둘째,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모세의 성소와 (새)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법궤(the ark of the covenant of Moses' tebernacle in the OT and of the temple of Jerusalem in the NT), 

셋째, 방주의 모양으로 지어진 노아의 선박(of Noah's vessel built in the form of an ark)


일곱째,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무'가 등장하며, 또한 이 '나무'가 중요하게 의미하는 바가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성경에서 '나무'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 또는 "율법"을 의미한다.(*두 감람나무 = 두 촛대 = 두 증인(1260일 예언함) = 신구약 성경; 참조: 요한계시록 11장 3~4절; 스가랴 4장 10~14절) 특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이브)에게 주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a.k.a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아니면 순종하지 않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를 선택하셔서 만들게 하신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을 보관할 법궤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곧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노아의 방주", 그리고 "법궤"가 동일선상에서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여덟째, 특히, 창세기 3장 3절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창세기 3장 11절에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라는 부분과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이라는 부분인데, 이것은 죄가 없는 초기의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원칙이 있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요한복음 1장 1~4절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또한,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사람에게 명령을 하신 말씀이었다. 즉,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실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순종에 대한 시금석으로 만들어 놓으신 율법(계명)​​을 의미한다. 다음의 원어적 설명은 명확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상징함을 말해준다.

 

["명하다"과 "계명"의 히브리어 의미]

(1) ​창세기 3장 11절의 단어, "명한;명하다"(동사)의 원어

→ 히브리어: "짜바" / 영어: command / 명령하다, 구성하다, 맡기다, 지정하다 등의 의미​

(2) 구약성경 전체에 사용된 "계명"(명사)의 원어

→ 히브리어: "미쯔바" / 영어:commandment / 계명, 법령, 명령 등의 의미

☞ 창세기 3장 11절의 "명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동사로서, "십계명"이라고 할 때의 "계명"이 바로 이 단어의 명사형태이다.

 

[창세기 26장 5절]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미쯔바)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20장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미쯔바)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의 역할과 상징은 곧, 하나님의 "계명(율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 전체에 기록된 "나무"의 의미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율법(계명), 명령, 말씀"을 상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홉째,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정말 나무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고, 또, 예수님 본인도 스스로를 "포도나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많은 나무의 비유에서 "나무"를 율법(계명), 또는 율법(계명)을 배운 사람(그리스도인)으로 빗대어 설명하시고, 그 나무의 "열매"를 율법의 실천(사랑)으로 빗대어 설명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예시로, 아래의 옮겨적은 성경절들을 읽을 때, "나무"에는 "계명(율법)" 또는 "그리스도인"을 대입하고, "실과" 또는 "열매"에는 "계명(사랑)의 실천"을 대입해서 읽어보면 명확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33절]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누가복음 13장 6~7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한 사람"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삼 년"은 예수님께서 당시 지상 사역을 하신 연수를 의미함)

 

[마가복음 11장 13~14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특별히, 위의 말씀은 신앙의 모양만 그럴듯하고 진정한 사랑의 열매는 맺지 못하는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을 빗대어 하신 말씀임)


열번째,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나무(십자가)"에 달리셔서 사람의 죄 값을 모두 치르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요한복음 3장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것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의(righteousness)" 그 자체인 율법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이다. (*로마서 5~8장, 갈라디아서 3~4장 참조)

 

둘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기초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셔서, 율법을 완전(텔로스=마침)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율법(계명) = 사랑"이라는 공식을 전 우주에 명확하게 증명하셨다. (*마태복음 5장 17~18절, 로마서 10장 4절 참조)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계명)의 완성이자, 사랑의 완성"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요한복음15장 12~13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베드로전서 2장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요한복음14장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D. 결론

 

이번 연구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즉, 마지막 때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왜 "노아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셨는지를 자세하게 알아보았다.

 

결론적으로,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십계명)"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책의 처음과 마지막을 관통하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앞서 열 가지의 성경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노아의 방주가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을 표상하는지를 설명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율법(방주) 안에서 보호받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씀을 무시하면 율법(방주) 밖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아의 방주"와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의 동일성을 확인하였다.

 

또한, "나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등장하며, 특히, "말씀되시는 예수님(요한복음 1장 1절~14절)"께서 직접 여러 번 "나무"에 관한 비유로 믿음과 천국을 설명하셨으며, 예수님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나무(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창조 때부터 예수님 재림 전까지의 모든 인류의 죄값을 치르셔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하나님의 율법의 온전함을 증명하셨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까지의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비유들을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노아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생각과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말씀이며, 또한,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각각 심판하는 "기준점"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이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명하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받지는 못한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값이 모두 치러졌다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성경이 기록하고, 예수님과 여러 사도들이 기록한 "구원의 과정"을 짧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얻었다는 그 표시(칭의; Justification by Faith)로써 물로 침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순간을 말씀과 기도로 점점 더 거룩(디모데전서 4장 )해지는 삶을 통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로마서 1장) 전진하게 된다(성화; Sanctification). 

 

둘째,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훈련을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시게 되어서, 결국, 그리스도인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사무엘상 )을 보시는데, 결국, 사람의 마음 속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지를 보시고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오늘 연구를 정리하면서, 또다시 한번 더 명백하게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성경책을 반으로 접었을 때, 창세기 6장부터 8장까지 기록된 "노아의 방주" 사건부터 거꾸로 돌아가서 창세기 1장의 창조까지의 모든 사건들,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기록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는 말씀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의 모든 사건들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하게 접히며, 똑같은 내용으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첫째 아담의 실수를 회복하시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인물-사건-제도는 원형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또한 예수님께서 성취하셨고, 또한 앞으로 성취하실 모든 것을 가리킨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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