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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성경적 의미 본문

bible n life [성경과 삶]

용서의 성경적 의미

BibleMotivation 2022. 12. 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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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누구에게나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과의 기억, 그 때 느낀 감정, 내가 받은 상처...

하지만, 확실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분의 아들과 딸인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며, 나쁜 일도 역시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최상의 결과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



사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험은 우리 자신의 이기심에 기반한 시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매일 그런 시험들을 경험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언제나 들어온다. 하나는 우리의 선한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이기심에 호소를 하는 사탄의 유혹의 생각이다.

하지만, 구약 성경 "욥기" 등 여러 성경말씀을 기초로 드러난 사실은, 사탄은 우리에게 죄된 생각을 넣어줄 수는 있어도; 다른 말로 하면, 사탄은 우리의 행동을 부추기거나 우리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는 있어도, 우리가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우리의 행동을 조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은 하나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창조 때에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그 둘 중에서 "하나님을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의지(Will Power)"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면, 그 이후의 모든 행동들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시편 37편 5~9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오늘의 주제인 "용서"도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하며 말씀하시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용서는 내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남에게 실천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기회이다.

용서는 곧 내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베푸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죄인인 그 상태 그대로 받아주셨듯이, 나도 나에게 잘못을 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 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둘째, 용서는 하나님께 모든 심판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되며,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행동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죽음은 아담과 하와(이브)의 불순종을 기점으로 죄지은 인류의 첫 조상을 포함한 창세 이후로 태어난 모든 생명; 즉, 의인이나 악인 모두에게 임한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것은 죽음(사망)의 존재는 곧 '죄'가 "생명이신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으로 당연한 결과인데, 사람이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그 불순종의 당연한 결과로써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16~17절; 3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심판은 최후에 하나님께서 하신다.

[요한계시록 20장 12~15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위의 요한계시록 20장에 기록된 심판은 둘째 사망; 즉,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악인의 심판과 사망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자신들이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또한 자신들에게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받았음에도 최종적으로는 그 용서를 경험하지도, 그리고 그 사실을 기초로 남을 용서하지도 않은 사람들인 것이다.


셋째, 용서는 나의 개인적인 고통과 걱정의 결과까지 모두 예수님께서 대신 책임지신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마태복음 6장 33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물질적인 것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태복음 6장은 33절이 그 끝이 아니다. 아직 하나의 성경절이 더 남아 있다.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내일 일을 위한 염려"; 즉, 우리 "인생의 괴로움"도 역시 포함시키고 계신다. 바로, 우리 인생의 모든 괴로움들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약속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 속에 역사하셔서 삶의 모든 걱정과 염려를 해결해 주시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하늘의 복이 너무나도 많으신 분이신 것을 우리는 말씀을 의지하여 기억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개인적으로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인생의 괴로움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발 앞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6장 33절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온전히 신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고, 우리의 삶을 책임지신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신뢰하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시금석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첫째는 십계명이고, 둘째는 십일조이며, 셋째는 바로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능력이 없이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용서하기로 선택하고, 진심으로 실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내가 아무리 말로는 나에게 잘못을 한 그 사람을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아직도 화가 나고 그 때의 일들이 생각난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아직도 그 사람을 정말 용서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모든 근심과 괴로움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보이는 행동인 것이다.


넷째, 용서는 믿음의 실천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회심한 사람이 첫번째로 실행하는 행동이다.


최근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여러 명의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 기회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모든 사람들에게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들 모두 회심을 경험하자마자; 즉, 다른 말로는 예수님의 용서를 마음 속 깊이 경험하자마자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들에게 잘못을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성경말씀과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을 통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은 그 깊은 회심의 경험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을 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받은 상처와 고통, 그리고 그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매순간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을 행한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분과 화, 그리고 때때로는 욕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시험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 분명히 그분께서 나의 나쁜 기억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

사실,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나에게 죄지은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우주적인 사건이며, 매우 큰 사건이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모든 말과 행동들과 내 마음 속의 상처들과 그 기억들까지도 모조리 다 깨끗하게 잊어버린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용서를 하려면 내가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남을 진심으로 용서했다는 말은 내 마음 속에는 더이상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 기억, 말, 행동 등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을 했던 그 사람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마치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변했다는 말인 것이다.

이런 마음은 절대 나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내가 다시 태어나야만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용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이며, 진실된 용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 "구원받은 사람의 축복, 또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자 마음"인 것이다.

밤늦게 예수님을 찾아간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다윗은 자신의 장수였던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은 죄를 범한 이후에,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질책을 듣고나서, 자신에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시편 51편 1~12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고 다윗을 포함하여 세상 끝날까지 태어나고, 죽고, 또한 살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사야 1장 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주셨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고 경험한 사람은 용서를 실천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될 것이다.


다섯째, 용서는 우리의 믿음의 실천임과 동시에,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십계명의 실천이다.


칭의-성화-영화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 삶과 그 결과인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다.

구원은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구원받은 사람; 즉,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그렇게 실천하게 도와 주시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순서를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을 실천하고, 십일금을 드려서 구원받는 것이 절대 아니다.(그것은 '율법주의'이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그렇게 자신의 의지를 다하여 매순간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실천하게 도와주신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용서도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온전하게 할 수 없다.
용서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마태복음 18장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이미, 베드로가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과 18장에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신다.
16장에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을 주셨고, 18장에서는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처사를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을 주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위의 질문이 이어진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8장 15절~18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중략)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마태복음 18장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질문의 문제점은, 그가 말한 용서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는 생각에 기초한,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용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의해 유발된; 즉, 성령 하나님의 마음의 호소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믿음과 실천의 개념을 당시의 베드로가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마태복음 18장 1절)에도 간접적으로 답이 된다.
예수님의 답변에 따르면,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중심(마음)”으로부터 반사하며, 그의 이웃들에게 “이와 같이” 행동하는 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대할 때 가늠할 수 있는 품성(믿음)의 진정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제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세우게 될 "교회"가 바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 세상에서의 작은 천국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회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언제나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주기도문"속에도 용서에 대한 기도를 주셨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장과 18장에서 말씀하신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고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첫째 계명~넷째 계명)", 우리가 받은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용서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다섯째 계명~열번째 계명)"는 십계명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말씀인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치는 말


용서는 믿음의 실천이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용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사함을 인정하는 행동이다.
용서는 하나님께 우리의 순종이 말뿐인지 아니면 진실된 순종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시금석 중에 하나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을 실천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가장 열정적인 제자였던 베드로; 나중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달려서 죽을 수는 없다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던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나요?"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돼(끝까지 용서해야 돼)"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정말 우리에게 용서를 계속 해야된다고만 말씀하시는 것이었을까?

계속해서 말하지만,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남을 전심으로 용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그 말씀은 바로 "내가 너희들을 끝까지 항상 용서해 줄께"라는 예수님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약속을 믿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용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아니,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징이며, 십계명의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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