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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의 비유 - 6 (슬기로운 다섯 처녀) 본문

parables of Jesus [예수님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 6 (슬기로운 다섯 처녀)

BibleMotivation 2023. 3. 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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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내려놓고 성령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품성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시작하는 말

 

「열 처녀의 비유」 시리즈의 지난 시간에는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열 처녀의 비유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어떤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인지를 알아보았다.

미련한 처녀들의 특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잘못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의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처음에는 등을 가지고 빛을 비추고 있었지만, 나중을 위한 여분의 기름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침례를 받고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인정하였지만, 최종적으로 마지막까지 그들의 믿음을 밝히는 것에 필수적인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완전하게 바꾸도록 그들 자신을 모두 다 내어주지는 않은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 속에 적절하게 심겨져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한다. 즉, 그들은 반석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최종적으로 그들의 옛 성질과 이기적인 마음이 완전히 깨어지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그들의 삶 속에 참된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 결여된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성령을 남에게 구걸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실 때, 그 사람 스스로가 말씀의 감화와 인도하심에 동의하는 것과 스스로의 이기심을 버리고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려는 노력도 당연히 포함된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들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모두 다 맡기고 약속하신 성령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재창조하시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 예수님의 성육신의 비밀은 곧 예수님의 "육신의 팔"로는 인간을 붙드시고 예수님 속에 원래 내제된 "신성의 팔"로는 하나님을 붙드시는 것에 있듯이,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 그리고 인간 측에서의 노력; 즉,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사탄이 인간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유혹의 음성과 생각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매순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필요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변화시키지 못하시고,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또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8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곧 사람은 절대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지만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거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그 사람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 속의 예수님을 보시고 그 사람의 품성을 판단하시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과정 속에는 예수님께서 모본을 보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빌립보서 2장 12절)"어야 하며,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야고보서 2장 22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게 도와주시는 분은 곧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복음 14장 26절)"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글에서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 비슷하지만 그들과는 반대점에 서 있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구원받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아볼 차례이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

 

[마태복음 25장 1~2절, 4~7절, 9~10절, 13절]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중략)...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위의 성경절과 그 내용은 모두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의 행동과 말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똑같았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고, 또한 모든 처녀들이 불이 켜진 등과 기름을 담은 작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랑이 늦게 오자 슬기 있는 처녀들도 미련한 처녀들처럼 모두 졸았다.

 

그러나,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의 어떤 특징이 신랑을 맞이하여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만들었는지 알아보고, 우리도 그들의 특징을 배워서 우리의 삶 속에 실천과 경험으로 녹여내야 할 것이다.

 


■ 슬기 있는 다섯 처녀의 특징

 

① 예수님께서는 이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에 대한 여러가지 단서를 이미 사복음서 속에 남기셨다.

 

  • 헬라어에는 "슬기롭다"는 단어가 대표적으로 두 개 있다. 하나는 "συνετός, ἡ, όν(수네토스)"이며, 또 다른 하나는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이다. 그리고, 마태는 25장의 "슬기롭다"는 헬라어를 후자인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로 기록하고 있다.

 

  • "συνετός, ἡ, όν(수네토스)"는 "이해력 있는, 총명한, 슬기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는 "슬기롭게, 현명하게, 민첩하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와 후자의 의미가 겉으로는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이 다른 의미이다.

 

  •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롭다"의 헬라어 원어 단어인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 슬기롭게, 현명하게, 민첩하게)"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14회 사용되는데, 이 중에서 무려 9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비유 속에서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에서 무엇을 지칭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셨을까? 아래의 성경절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φρονίμως(프로니모스: 슬기롭게, 현명하게, 민첩하게)"를 사용하신 말씀과 비유들이다.

 

[마태복음 7장 21,24절]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 예수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 = 지혜로운 사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중략)...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10장 16절] ☞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사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24장 45절] ☞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 하나님의 사람들을 맡아 양식을 나눠 줄 사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마태복음 25장 2절,4절,8~9절] ☞ 슬기 있는 자 = 그릇에 기름(성령)을 담아 등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누가복음 12장 42절] ☞ 하나님의 청지기 = 하나님의 집의 종들을 맡아 양식을 나누어 줄 사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누가복음 16장 8절] ☞ 하나님의 청지기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슬기롭다"는 단어를 아래의 비유와 말씀에서 사용하셨다.

 

첫째, 반석(예수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지은 사람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

 

둘째,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보내시면서 주신 권면의 말씀; 즉, 전도자가 가져야 할 특성인 뱀처럼 지혜로움과 비둘기처럼 순결함

 

셋째, 하나님의 청지기로써의 직분의 특성; 주인의 종들을 관리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사람

 

넷째, 등과 등불과 기름까지 챙긴 슬기로운 처녀

 

다섯째, 주인에게 칭찬받는 청지기

 

  •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이라는 단어가 기록된 성경절들을 통하여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나라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의 표본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 위의 사복음서의 성경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하며,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디모데후서 4장 2절)"해야 한다.

 

  • 그리고 그렇게 실천한다면,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디모데전서 4장 5절)"게 되어,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디모데전서 4장 6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과 모본으로 관리하고, 그들에게 때를 따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사랑; 즉, 경험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전도"는 바로 위에 적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면, 조금씩 예수님의 품성을 본받아 변화되는 나의 상태를 내 주변 사람들이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깨닫고 알아보게 되며, 그렇게 그 사람들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경험적인 믿음의 실천과 품성의 변화"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전도의 기초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마태복음 5장 14절)"라는 구절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4~16절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디모데전서 4장 4~6절]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 또한, 이러한 성화의 과정을 계속 밟아 나간다는 의미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에베소서 4장 13절)"른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 결론적으로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은 바로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본과 하나님의 말씀 만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은 매 순간마다 현명한 선택; 즉, 마음 속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사탄의 생각을 거절하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예수님의 모본을 민첩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인 것이다.

 


② 슬기있는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따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 행동의 의미는 그들이 이미 자신들의 영적인 부족함을 깨달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을 믿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다른 말로 하면, 슬기 있는 처녀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마태복음 5장 3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었다.

 

  •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가져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곧 그들 스스로의 믿음에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신이 가진 믿음 정도면 충분히 의롭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과 신앙, 그리고 품성이 어떤 외부적인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어느 정도까지만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처녀들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 앞에 자신들을 온전히 굴복시키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예수님)를" 끝까지 따라가지는 않은 사람들인 것이다.

 

  •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자아는 아직도 살아서 꿈틀대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즉, 하나님의 십계명과 인간을 향한 사랑 앞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미련한 처녀들은 하늘나라의 바로 앞까지 왔지만 최종적으로 하늘나라에는 들어가지 못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 이 세상 그 누구도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 예수님의 품성을 닮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품성을 닮는 것은 나면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우리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시편 51편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예수님을 닮은 품성의 변화는 점진적이다. 생각 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순간 품성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거나, 또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은 이후에 내가 어떤 이기적인 선택을 해도 회개가 필요없이 하나님께서 이미 다 용서해주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책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성령의 역할과 능력은 전혀 그렇게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닮은 품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사했지만, 우리는 아직 예수님처럼 거룩해지는 과정 속에 있으며 매일마다 마음 속에서라도 죄를 또 짓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성경이 기록하는 죄는 인간의 못된 생각이나, 행동 등의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가진 죄의 단순한 결과일 뿐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우리가 정말 깨달아야 할 우리 속의 죄악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사탄이 뿌려놓은 불순종의 씨앗이며, 이 씨앗은 이기심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같은 죄를 다시는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으며, 또한 결과적으로 구원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지금까지 계속 하늘 지성소에서 대속죄일의 대제사장으로써 우리의 매일의 회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히브리서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히브리서 3장 1절; 8장 1~2,6절; 9장 11~12,23~24,28절; 12장 2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현재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 즉, 하늘성전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사역을 베풀고 계신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 안에 거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이며, 또한 오직 그렇게 될 때에만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반복될 때에 우리의 품성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할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도우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으심과 보여주신 모본을 통하여 우리가 실천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순종)도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능력이다.

 

  • 다음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몇 가지 성경절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 15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전서 1장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디도서 3장 4~7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장 3,30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6장 17~18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갈라디아서 5장 5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요한일서 5장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계시록 1장 10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계시록 21장 10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로마서 8장 1~4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전서 12장 6~11절]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기록하는 "방언의 은사"를 잘못 이해하여, 무슨 이상한 말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기록하는 "방언의 은사"는 영어로는 "Another divers kinds of tongues(KJV)"; 즉, 헬라어 원어로는 "γλῶσσα, ης, ἡ(글롯사: 혀, 언어, 다른 나라의 말)"이며, "통역의 은사"를 말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마태복음 6장 7절)"고 말씀하셨는데, 이 성경절에서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의미는 영어로 "Use not repetitions(KJV)"; 즉, 쓸데 없는 단어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현재 일부 개신교회에서 "하늘의 언어"라고 부르면서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알 수 없는 언어로 약간 광적으로 "@#@$#$^%^%##"라고 계속 비슷한 단어들을 입으로 쏟아내면서 하는 기도는 사실상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종류의 기도이며, 그것은 애초에 기도가 아닌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진리에 기초하여 신앙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물론,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거나 기도할 때, 또는 교회에서 감동적인 설교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이 느껴지며, 또한 그 감동과 성령의 역사는 진실되며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맛보기인 것이다.

 

  • 말씀연구나 설교를 듣고 느낀 감동과 은혜가 일상생활로 옮겨져 와야 한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나서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들의 말과 행동이 교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그냥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 교회는 감동을 얻으려고 출석하는 곳이 아니며, 신앙과 삶은 별개가 아니다. 만약, 감동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냥 극장에 가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그런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된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다.

 

  • 삶이 예배요, 예배가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품성의 변화는 우리의 목숨과 인생을 걸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말씀과 기도로 살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실천되지 못한 믿음과 신앙과 말씀은 전혀 능력이 없으며, 품성의 변화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아멘"한 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자기의 자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말을 했다고 해서 화를 내며 폭풍 잔소리를 퍼붓는다면, 또는 이번 한번 뿐이라고 스스로의 신앙을 타협하며 밤새도록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인다면, 그것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로마서 13장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히브리서 5장 8~9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베드로전서 1장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야고보서 2장 14~18절; 22절; 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와 마태복음 22장의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유」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와 인연이 깊으시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렸던 첫번째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많은 교훈들에서 혼인잔치를 빗대어 설명하셨다.(마가복음 2장 19절; 누가복음 12장 36절;14장 8절)

그리고, 마태복음 22장과 25장에서 각각 혼인잔치에 대한 두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으며, 구약성경에서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분의 신부로 표현(아가서 등)하였으며,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을 신부로 묘사하였다.


■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유」의 핵심 쟁점

 

  • 그중에서도 특별히 마태복음 22장 1절부터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비유는 여러 부분에서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와 닮아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관계에 있다.

 

  • 마태복음 22장 1절부터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에서의 쟁점은 바로 "예복"이다.

 

  • 이 비유에서 임금은 이미 혼인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이 있었다.(마태복음 22장 3절) 그래서, 이 임금은 혼인잔치에 그 사람들을 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혼인잔치에 오기를 싫어했기 때문에(3절), 임금은 또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서 혼인잔치에 오라고 부른 것이다.(4절) 그러나, 이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기 밭으로, 자기 상업차로 가거나, 임금의 종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5~6절) 임금은 결국 노하여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잔치에 초청했다.(7~10절)

 

  • 이제,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게 되었다.(10절)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혼인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이 임금님이 손님을 보러 들어와서 그들의 예복을 검사했다는 것이다.(11~12절)

 

[마태복음 22장 11~13절]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복이 주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입지 않은 사람들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혼인잔치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예복이 주어졌음에도 입지 않은 사람들은 혼인잔치에서 쫓겨났다.

 

  • 이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예복"은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선하신 품성을 표상하며, 모든 구원받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어 하나님 앞에 그들 자신이 감추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진리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킹제임스역 성경(KJV)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 즉,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 초기 언셜체(uncial) 사본들 중에서 「시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만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두 사본은 모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서체 사본들은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고대의 번역본들은 교부들의 인용문들과 비슷하게 그 독법에서 나뉘며, 특히,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헬라어 원어로는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본래의 독법이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앞의 두 가지 어절을 헬라어로 하면 아래와 같다.(두 어절이 비슷하다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글 음역만 적어 보았다.)

 

①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 "호이 플뤼논테스 타스 스톨라스 우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 "호이 포이운테스 타스 엔톨라스 아우투"

 

  • 위의 두 어절에서 어떤 것이 원래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사용된 것인지를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성경 전체의 내용과 흐름, 그리고 요한계시록 전체와 22장의 문맥과 배경에는 둘 다 어울리는 내용인 것은 분명하며, 특히, 사도 요한의 가르침과 조화를 잘 이룬다.(참조 성경절 - 요한계시록 12장 17절; 14장 12절; 요한복음 14장 15절; 21장 15절; 요한일서 2장 3~6절 등) 

 

  • 또한, 앞에서 언급한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는 한 무리의 성도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의 자격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이다. 우리의 구원의 적합성은 빤 두루마기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나누어 주신 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누어 주신 의의 외적인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루마기를 빠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이 두 개념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특히, "두루마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στολή, ῆς, ἡ(스톨레; 스톨라이)"인데, 이 단어는 한 사람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위로부터 흘러내리는 겉옷에 사용되는 단어이다.(참조 성경절 - 마가복음 12장 38절; 16장 5절; 누가복음 15장 22절; 20장 46절 등) 또한, 동일한 단어가 「70인역 성경」에서는 아론과 그의 자손의 거룩한 옷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출애굽기 28장 2절; 29장 21절) 그리고 나중에 이 헬라어로부터 파생된 영어단어인 "Stole(N: 제의)"은 목을 두르고 어깨로부터 흘러내리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성직자의 옷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 두 비유의 관계

 

자, 이제 마태복음 22장의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에 대한 비유"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의 관계에 대하여 결론을 내려보자.

 

①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서는 임금님이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예복"을 검사했으며, 이것의 의미는 곧 초청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닮은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사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어 그 속에 감추어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가 성화의 과정의 온전한 결과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신 의의 외적인 증거라고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또한,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지금 하늘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써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기록한다.

 

③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지는 것은 죄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바로 성령을 의미하는 "기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록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어서 등불이 꺼져갔지만, 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즉,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그들의 삶 속 깊은 뿌리까지 변화시키도록 그들 스스로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④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열 처녀의 비유에서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외침에도 자신의 등불을 밝히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곧 모든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교회에 출석하며 열심히 봉사했지만, 결국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여 예수님을 닮은 품성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 앞에 그들의 믿음의 결과인 품성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자격미달로 판단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과 같다. 즉,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맛보았지만, 최종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들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거절함으로 하늘나라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마태복음 22장의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의 비유를 끝맺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2장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우리 각자의 믿음의 여행에서 최종 목적인 구원을 놓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며, 또한 그러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정답은 바로 하늘 지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신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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