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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가는 길: 바른 성경연구

그리스도인의 삶과 구원의 여정(feat. 경험적인 신앙인) - part 01 본문

bible n life [성경과 삶]

그리스도인의 삶과 구원의 여정(feat. 경험적인 신앙인) - part 01

BibleMotivation 2023. 5. 25.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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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을 들으면서, 글을 읽어보세요 ^^


시작하는 말

 

오늘의 글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본 블로그, "엠마오 가는 길"은 나의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에 의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① 목회의 길에서 떠난 신학생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유학을 떠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4년 간의 신학 대학에서의 학업 후 신학 석사과정까지 모두 마쳤지만, 당시에 어떤 외적인 이유로 개인적인 영적 부족함에 대한 실망을 하게 된 이후, 목회자로써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고, 그 후에 내 자신의 개인적인 재능을 과신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재능을 오로지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며 돈을 버는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렇게 TOEFL 강사로의 삶에만 집중하며 10여 년 동안 살았었다.

 

그러는 동안, 교회와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을 바라보며, 어떤 때는 '교회 지도자들도 저렇게 타락(?)하며, 세상과 타협하는데...'라는 마음과 함께, '내가 나의 영적인 부족함 때문에 목회자로써의 길을 포기한 것이 괜한 결정이었나?'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나의 죄와 부족함이 더 크고 명확하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보여주시고 매순간 가르쳐 주신 삶의 여정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길인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서는 부족하더라도 당신을 충실하게 따르며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후회될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지 않는 분이심을 조금씩이지만 뚜렷하게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을 연구하며 전하는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름이 아닌 내가 '교회를 더 이상 섬기지 않으리라', '하나님을 떠나리라' 다짐했던 당시의 경험 때문이었다.


② 사탄은 언제나 내 안의 선함(사실, 인간에게 진정한 선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원래 없기 때문에, 그냥 "나 스스로 선해지고 싶은 이기적인 욕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까지도 이용해서 나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내 안의 선함은 결국 진정한 선함은 아니었으며, 내 이기심에 기초한 겉으로만 선함이었다... 내 안에는 선함이 없다! 선한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TOEFL강사로써의 삶을 시작한 나는 그 당시에 내 주변의 어느 성실한 목사님의 어려운 사정을 바라보는 제3자였고, 그 목사님이 교회 안의 어떤 기관에서 수년간 발생했던 하나의 부정한 사건을 파헤쳐서 공론화시키려는 것을 교단의 지도자 목사님들이 무마시키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부당한 일들; 부정직하고 말도 안되는 일들을 겪으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또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교회의 부정한 것을 밝혀서 바로잡으려고 하는 그 목사님을 해임시키려고 하였고, 나는 그러한 교단의 지도자들의 부당한 결정을 처음에는 그냥 단지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는 그 성실한 목사님을 돕기로 결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나에게도 교단 지도자들의 냉대와 차가운 시선, 또한 그들이 가짜로 만들어낸 거짓말들로 나를 우롱하고 욕하는 그런 일들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다. (나를 한번도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깊게 대화를 나누어 본적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비난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마음 속 깊은 고통과 억울함이 크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마지막 때의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의 상태가 바로 예수님 초림 때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상태와 비슷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이런 교회 지도자들의 비신앙적인 모습들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믿고 있다.)

 

특히, 그 사건이 한창 발생하고 있을 때, 그 사건을 잘 해결하기 위하여(?) 파견된 교단의 지도자 목사님과의 1:1 대면의 시간 중에 그 지도자 목사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 정말 큰 충격이었다. 그 목사님이 나에게 했던 충격적인 말은 다음과 같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짜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왜곡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시각이다. 이렇게 발생한 사건을 무마시키고 정상으로 돌리는 것은 바로 지도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하여 앞으로 이리저리 말을 하게 될 것 같으면, 법적인 책임을 물리겠다. 자신 있느냐?"

 

그 목사님 본인은 나에게 진실을 덮으려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되려 진실을 말하는 나에게는 "법적인 책임을 물리겠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이 나에게 했던 어떤 말보다도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훨씬 더 충격이었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고, 납득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하는 목사의 입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아마도, 지금 다시 그 목회자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냐고 물으면, 아마도 자신은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목사님의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 또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전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발생한 부정직한 사건의 결과가 곧 진실을 말하고 밝히려는 사람들에게 전혀 불리하게 결정되었다는 것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교회를 떠날 결심을 했고, 그 이후로 실제로 약 1년 동안 어떤 교회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잘못된 결심이 지금의 말씀연구로 이어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③ 성경연구의 시작과 작은 깨달음

그렇게 교회를 떠나게 된 나는 '이왕, 교회와 신앙을 떠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신지를 확인해보고 떠나더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교회를 출석하는 대신, 그 시간에 집에서 성경을 펼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학을 6년 이상이나 공부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눈을 여시고 새로운 성경의 진리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내가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했던 신학은 단지 하나의 학문에 불과했다는 생각; 물론, 내가 부족해서 배운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들 정도로 나는 성경연구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어떤 다른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고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말하는 거의 모든 문장의 주어였던 "나", 또는 "내가"가 문장의 목적어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이끄시기 위한 하나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있는 중이다. 

 

특히,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의 믿음의 부족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지, 만약 한 순간이라도 사람을 바라보면 실패하게 되어 있다. 

사탄은 사람의 이런 부정적인 특징들을 매우 잘 알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일을 겪을 때 매우 자주 자신의 이기심을 따르는 선택을 한다는 약점을 노리고 있으며, 그 약점을 통하여 매순간 우리를 공격하려고 틈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우리의 모든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실패의 경험 이후로.. 나는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라는 종교개혁의 기준을 나의 신앙과 생활의 기준점으로 정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말씀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및 인류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발견하는대로 기독교의 종파와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본 블로그에 공유하고 있다.

 


④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어쩌면 나는 뜨거운 가슴은 가지고 있었지만, 냉철한 머리는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나의 재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가 그렇게 그 억울한 목사님을 나의 생각대로 돕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항상 그런 이기적이고 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실수를 기회로 바꾸셨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재능 사용의 실패를 하나님을 위한 성공으로 변화시키셨으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믿는 행동에 실패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오히려 더 큰 변화의 계기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런 분이시다...

 

나의 신앙은 여전히 약하지만, 나의 이기심의 선택을 하는 대신에 예수님을 매순간 선택하기로 언제나 기도한다.

나는 여전히 넘어지지만, 넘어져도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매순간 배우고 있다.

 


⑤ 나의 변화의 계기와 성경이 기록하시는 구원의 과정

사실, 하나님의 만나서 변화를 향하여 전진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비슷한 경험을 한다. 또한, 내가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 것도 성경적인 구원과 변화의 단계와 닮아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그 과정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성도들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같은 과정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며,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것이다.

 

성경이 제시하며, 나도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구원과 품성의 변화의 단계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가장 큰 죄인이며, 나의 모든 계획과 의도는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 기독교는 인정(Admission; Acknowledgement and Confession)의 종교이다. 구원은 나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때, 나의 죄가 더 크게 발견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더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로마서 5장 20절)"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은 공의롭지 못하며,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율법을 글로써 표현하신 십계명의 두 요약인 "하나님 사랑""사람(이웃)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실천하심으로써 온 우주에 명백하게 "하나님의 율법은 곧 사랑이다"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 베냐민 지파로써 가말리엘 학파의 수제자였으며,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당대의 최강대국이었던 로마의 시민권자였으며, 당시에 유대인의 지도자들로부터 가장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사울은 유대의 지도자들의 명령에 따라 초대교회의 일곱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을 잡아 죽이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사도행전 7장 58절; 8장 1절).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고, 그 이후에 그는 몇 년 동안 "아라비아로 가서(갈라디아서 1장 17절)" 성경말씀을 다시 연구하고, 구약성경의 말씀과 예언 속에서 예수님을 명확하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그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디모데전서 1장 15절)"라고 고백했으며, 예수님을 아는 지식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빌립보서 3장 8절)고 말했다. 

 

2.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모두 사하셨음을 인정하기

☞ 요한복음 3장 16절은 창세기 3장 15절로 시작되는 성경의 모든 언약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이다. 또한, 그 마무리는 곧 요한계시록 22장 13~14절에 기록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는 말씀에서 처럼, 곧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그들의 죄된 품성을 의미하는 겉옷을 빨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결과로 이어진다. 

 

☞ 이와 동일한 개념으로, 마태복음 22장에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느 임금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유의 핵심은 곧 11절의 "예복"이다. 이 예복은 곧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그 죄가 사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품성"을 표상하며, 예수님을 닮은 품성;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에베소서 4장 13절)"기 위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변화의 첫번째 단계가 바로 "나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칭의: Justification by Faith)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의 비유는 곧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와 이어지며, 이 두 비유는 모두 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재림을 앞둔 상태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두 부류에 대한 설명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이 바로 성령의 감화로 변화된 품성인 것을 결혼예식으로 표상하여 보여주는 비유들이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이 표상하고 있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한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품성"을 가지는 것이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인 것이다.

 

3. 매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지하여 나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성경말씀/십계명)에 맞추기

☞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시고 군병들에게 잡히시기 전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누가복음 22장 42절)"신다고 기도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주기도문 속에도 역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마태복음 6장 10절)"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으며 현재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바로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노력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계신다. 그리고, 팔복과 이어지는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고 말씀하셨다.

 

4. 그러면, 나의 마음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물질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심을 경험하기

☞ 물리적인,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하나의 가시적인 결과; 즉, "마태복음 6장 33절"의 경험이면서, 이와 동시에, 구원의 맛보기; 즉, 최종적인 구원을 아주 작게 경험시켜 주시는 것이다.

 

5. 이러한 경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교훈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 매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나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선택을 해서 또다시 넘어지더라도 다시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는 삶을 살기

☞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잠언 24장 16절)"나는 사람이다.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믿음과 신앙의 관계

 

오늘 글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은 바로 "경험적인 신앙"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인생에서 어떤 것이라도 경험을 하려면, 먼저 무언가 내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오직 나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그 행동의 결과가 실패인지 성공인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변화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신앙의 경험과 성장도 이런 인생의 원리와 똑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배이며, 또한 예배가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과 이 세상에서 일하며 돈벌고 살아가는 삶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즉,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바로 나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원하신다.

 

그리고, 가장 첫번째 그리스도인이면서, 또한 완벽하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님이신데,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다각적으로 풀어서 보여주는 성경책이 바로 사복음서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요한복음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의 모본과 그분의 말씀, 및 십자가까지의 모든 승리의 과정을 네 명의 제자들이 각자 다른 시각으로 기록한 것이며, 또한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하여 성경연구자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합적이면서도 다각적이며, 입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경험을 주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획하신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복음서의 주제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대장 격인 4지파의 깃발에 그려진 상징과 일치하는데, 유다 지파, 르우벤 지파, 단 지파, 에브라임 지파가 각각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자리잡고 있는 12지파의 대장 지파들이었으며, 유다 지파의 깃발은 "사자", 르우벤 지파의 깃발은 "사람얼굴", 단 지파의 깃발은 "소",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의 깃발은 "독수리"였다. 각 대장 지파의 깃발의미는 아래와 같다.

 

*유다 지파 - 사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르우벤 지파 - 사람얼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에브라임 지파 - / 섬기고 봉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단 지파 - 독수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이 결과적으로 제시하는 사복음서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회복과 믿음의 관계"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첫번째 관계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롤모델이 되신다는 것이다.
두번째 관계는 회심하고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이자, 믿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① 첫번째 관계 -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요한복음은 먼저 "나(그리스도인) 자신의 변화"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와 십자가는 그분이 둘째 아담으로써 첫째 아담이 원래 보여주었어야 하는 삶의 모본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확하게 제시하신다. 

 

☞ 성육신; 즉, '인간의 몸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들어가 계신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삶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다. 또한, 새벽마다 기도로써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셨으며, 그분이 하셨던 모든 말씀과 베푸신 모든 기적들은 그분 속에 원래 내제되어 있는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그 능력을 받아서 행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인간의 육신은 죄가 없는 그냥 인간의 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고린도후서 5장 21절), 그리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베드로전서 1장 19절)"라고 명백하게 밝히신다. 이 사실에 대하여, 절대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로마서 8장 3절)"으로 오신 것; 즉, 인간의 겉모습(모양)만 취한 것이지, 인간의 죄까지 취하신 것은 아니었다. 죄가 있는 누군가가 또다른 죄인의 죄를 모두 사하는 목적으로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다.

 

☞ 또한,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통하여 이 땅에 실행하고자 하셨던 사랑의 계획을 온전하게 완성하신 것이었다. 첫째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써 천지창조로 시작되었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실패하게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힙입어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을 온전하게 실행하셨던 것이다. 

 

☞ 사탄은 인간을 타락시킨 이후에 계속 주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은 이미 죄에 빠졌기 때문에 의로운 마음과 실천을 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애초에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강요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긍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죄없는 삶은 이러한 사탄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 사탄은 자기가 죄에 빠뜨렸고, 또한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한 이 지구에, 죄와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한 사람; 즉, 예수님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했을 것이며,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생애를 살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완성한다면, 자신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며, 자기에게는 최종적으로 멸망이 이르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인간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사업을 완성하셨으며, 온 우주에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그분의 삶과 십자가의 보혈로써 온전하게 증거하셨다.

 

☞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모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본과 목표로 삼아야 하는 가장 최고의 예시이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을 실천하는 삶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을 사셨다.(요한복음 15장 10절)

 

☞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그분의 삶의 모본을 따라서 믿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텐데, 아담 이후로 우리인간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뼛속까지 두 마음이 존재하는 죄인이며,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해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제되어 있는 "죄의 사망의 법"때문에(로마서 7장 14~25절; 특히 21~25절 참조)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떤 이기적인 마음이 하나도 없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오직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으로만,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준이 되는 십계명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의 변화와 힘, 그리고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② 두번째 관계 - 두번째 도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품성의 변화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또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삶과 품성에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 예수님을 닮은 품성의 변화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의 구심점은 바로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죄사함(매일의 칭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일의 칭의의 경험의 결과는 바로 매일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십계명의 첫번째 부분)"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겉으로 나타내 보여지는 결과가 바로 "이웃 사랑"인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삶과 십자가의 모본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진리를 온 세상에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삶을 가리켜 "예수님을 닮은 품성으로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부르며, 요한계시록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성도", 또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서 "팔복"을 선포하셨는데, 전에도 설명했었지만, 이것은 바로 성경 전체의 기초를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 중에 하나이며,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을 풀어 해설한 것이다. 팔복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즉, 십계명의 첫째 부분(1~4째 계명)을 실천했을 때, 주어지는 첫번째 네 가지의 복(마음)과 그렇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십계명의 둘째 부분(5~10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과 의지가 생기게 되며, 바로 두번째 네 가지 복은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어지는 복(마음)인 것이다.

 

 

*창조와 재창조(구원)의 원리는 같으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항상 한 목소리로 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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