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엠마오 가는 길: 바른 성경연구

탕자의 비유 - part 06 (주변인물②: 아버지 집의 종들) 본문

parables of Jesus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 - part 06 (주변인물②: 아버지 집의 종들)

BibleMotivation 2023. 10. 10. 10:20
728x90
728x90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실된 종의 자세는 믿음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시작하는 말

 

지난 「탕자의 비유」 연구 시리즈의 다섯 번째 글에서는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변인물들 중에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첫째 아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아들의 면면을 확인해 본 결과 아래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①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봉사는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이라 여기지 않는 봉사였고, 종으로써의 봉사였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 누가복음 15장 28~30절에서 드러난 첫째 아들의 말 속에 사용된 단어인 "섬겨(δουλεύω; 둘류오)"와 "살림(βίος; 비오스)"의 원어적 의미를 통하여, 첫째 아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리고 첫째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마음이 동생이 떠난 후에 어떠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② 첫째 아들은 자신의 동생인 탕자가 다시 돌아왔을 때,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가 일한 댓가를 일일이 모두 받을 생각을 했던 한 사람의 종으로써 스스로를 대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생각과 정신은 물질적인 것과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성경은 분명히, 죄인이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이전에 반드시 은혜의 왕국이 그의 마음 속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초림(마음 속의 은혜의 왕국: 구약의 목적) → 재림(물리적인 하나님 왕국: 신약의 목적)
  • 이 첫째 아들의 정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2,13절에서 예수님 자신을 자기가 돌보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목숨바쳐 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목자로 나타내셨고, 이와 반대되는 의미로써, 눈에 보이는 돈과 재물에 자신의 목적을 두고 양이 죽던지 말던지 자신의 목숨만 지키는 삯꾼을 비교하셨다.

③ 결과적으로, 이러한 첫째 아들과 탕자였던 둘째아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탕자(둘째 아들)은 자신의 위치가 아버지의 종보다도 못한 품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 주셨다.
  • 그러나, 첫째 아들은 한번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적이 없으며, 평생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 드러난 사실은 그가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었지만 스스로는 종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 즉, 하나님의 율법(=사랑)이 갑갑하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율법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다시 돌어온 탕자와 하나님의 율법 속에 머물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던 첫째 아들을 비교하고 있음을 이 비유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사실을 기초로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믿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살펴서 확인하고, 또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한 발자국 더 전진해야 할 것이다.

이번 「탕자의 비유」 연구 시리즈의 여섯 번째 글에서는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아버지 집에 있었던 종들"을 살펴보고, 예수님의 여러 비유들 속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종들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종들(vs 품꾼;삯꾼)

[누가복음 15장 17~2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위의 성경절에서 붉은색과 밑줄친 부분은 "아버지의 종들"에 대한 내용이며, 이 부분들을 자세하게 다시 읽어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면서 자신 스스로를 지칭했던 "품꾼"이라는 단어 실제 아버지 집의 종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탕자의 스스로에 대한 이해: 품꾼; 삯꾼

  • 위에 옮겨적은 성경절에서 탕자는 아버지 집의 종들을 "품꾼"이라는 단어로 직접 표현하고 있는데, 헬라어 원어로는 "μίσθιος(미스디오스; 3407)"이며, 이 단어의 의미는 돈을 받고 일하는 '임금 노동자', '고용된 일꾼'으로써, "품삯, 보응, 삯, 보상, 보수"등을 의미하는 헬라어 명사인 "μισθός(미스도스; 3408)"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또한, 이 단어는 요한복음 10장 12절에서 언급되는 "삯꾼(μισθωτός; 미스도토스; 3411)"의 어원이기도하며, 기본적으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직접 언급한 "품꾼"과 같은 어원을 가진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 이 사실은 곧 탕자가 인생의 최악의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자신은 지금껏 아버지의 아들도 아니었고, 충성된 종도 아니었으며, 단지, 돈만 받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며 어떠한 사명감도 없이 살아갔던 삯꾼이었음을 인정하였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 그리고,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 스스로를 아버지에게 "충성된 종"으로써가 아닌, 단지 돈을 받고 일하는 "삯꾼"의 신분으로 받아달라는 말을 하기로 결심한 것; 즉,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깨닫고 인정했으며, 비록 자신이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더라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자신을 아무런 필요없는 삯꾼일지라도 분명히 다시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아버지의 사랑에 기초하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바로 이 고백과 경험은 지난 「탕자의 비유」 연구 시리즈의 네번째 글에서 비교했던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의 고백의 경험과 똑같은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곁길로 빠져서 믿음을 잃을 때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때로는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같은 힘든 일을 경험하게 하셔서라도 우리 스스로의 위치와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계획하신다.

사실, 탕자의 결심과 회개에 대하여 한 가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데, 바로 누가복음 15장 17절에 기록된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이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ἑαυτοῦ εἰς ἔρχομαι(헤아우투 에이스 엘코마이)"인데, 영어로는 "He came to himself"이며, 직역을 하면, "그는 원래의 자기자신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이다. 아래에는 해당 부분에서 사용된 단어들의 원어적 의미이다.

① ἑαυτοῦ(헤아우투; 1438) - 자기자신, 그것 자체, 스스로

② εἰς(에이스; 1519) - ~에게, ~를 향해, ~안으로, ~안에

③ ἔρχομαι(엘코마이; 2064) - 오다, 돌아오다, 가다 / 완료와 미완료 시제에만 사용되는 중간태

◼︎ 아버지 집의 종들

  • 탕자는 스스로를 품꾼; 즉, 삯꾼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아버지 집의 종들은 말 그대로 집에 거주하면서 함께 사는 충성된 "종"이었다.
  •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맞아들이면서, 종들에게 자신의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입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축제를 벌이자고 말씀하셨다.
  • 그러자,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종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누가복음 15장 22~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종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둘째 아들의 귀향에 다함께 즐거워하였다. 바로, 주인의 즐거움이 자신들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과 태도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충성을 다하는 종들의 자세인 것이다.
  • 이 “종”을 의미하는 헬라어 원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정말 많이 알려진 단어이며, "δοῦλος(둘로스: 1401)"라고 표기한다. 이 단어의 의미는 "노예, 명령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는 자, 주인의 소유, 상급자에게 전적인 의무를 가진 자"등인데, 마태복음 18장 23절 등에서는 왕의 "신하(장관)"라는 의미로써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모든 종류의 의존적인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 즉,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된 종"이란, 원어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맡겨진 의무를 다하는 자"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 아버지 집의 종들의 특징

  •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의 집의 종들의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실천하는 종들

  • 아버지 집의 종들은 그들의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 그들은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탕자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탕자의 발에 신을 신겨라", "탕자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는 그들의 주인의 말씀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수행했다.

②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종들(feat. 달란트의 비유; 마태복음 25장 21,23절)

  • 그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종들이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 15장 24절에는 "저희(종들)가 즐거워하더라"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충성된 두 종들에게 주인이 어떤 말을 하시는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신다.

[마태복음 25장 20~23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원어 설명]

*즐거움 - 헬라어 원어 "χαρά(카라; 5479)" : 헬라어 기본동사 "χαίρω(카이로; 5463)"에서 파생된 명사로써, "유쾌함, 은은한 기쁨, 기쁨의 대상"의 뜻이며, 또한, "즐거운 잔치"라는 의미(마25:21,23, 요17:13)로도 사용된다. /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20절에서는 "영광"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에 - 헬라어 원어 "εἰς(에이스; 1519) : (시간, 장소) ~안으로, ~안에, ~에게, ~를 향해

*참예하다 - 헬라어 원어 "εἰσέρχομαι(에이스에르코마이; 1525)" : (시간, 장소로) 들어가다, ~를 통하여 가다, ~를 누리다

*즉, 충성된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들인 것이다.

 

③ 주인과 돌아온 주인의 둘째 아들인 탕자와 함께 먹고 즐긴 종들

  • 그들은 평범한 종들이 아니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종들이었으며, 주인이 베푼 잔치에 함께 참여하여, 기쁨을 나누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참된 의미의 종들이었다.

④ 첫째 아들에게 좋은 소식을 듣고 보고 경험한 그대로 증거한 종

  •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집의 종들은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증인이었다.
  • 첫째 아들이 일터에서 돌아와 온 집안에 떠들썩한 것을 보고는 어느 종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을 때, 그 종은 가감없이 둘째 아들; 즉, 첫째 아들의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왔으며, 주인께서 명령하신 대로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마신다는 진실(=진리; Truth, Good News)을 말하였다.

[누가복음 15장 25~27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 집의 종들은 성경에 제시하시는 "선한 종"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선한 종과는 비교되는 달란트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악한 종의 생각

  • 그렇다면, 악한 종이 그의 주인에 대하여 가진 생각은 어떠할까?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서 "종"이 등장하는 비유들이 꽤 여러 개 존재하는데, 그 비유들의 공통점은 바로 주인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신실한 종들이 있는 반면에, 불성실하고 악한 종들도 역시 그 비유들 속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 특히, 마태복음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 기록된 종의 비유에서는 이러한 "악한 종들"의 생각과 행동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바로 다음 장인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 기록된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한 달란트 받았던 악한 종이 그의 주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악한 종들이 가진 주인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이 결과적으로 표출된 그들의 행동들을 선하고 충성된 종들의 생각과 행동과 비교하여, 현재의 나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45~51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25장 24~30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위의 달란트의 비유는 명확하게 악한 종의 생각에 대하여 알려준다.

 

①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주인이 늦게 왔으면 좋겠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며, 이와 같이, 겉모습만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마음 속으로는 예수님께서 늦게 재림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성경의 여러 표현은 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과 현재에 대한 그것의 영향력과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내일 오셔도, 혹은 100년 후에 오셔도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으로써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② 악한 종은 주변의 다른 종들을 괴롭히고 때리며, 나쁜 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 마태복음 24장 49절에는 악한 종들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데, 헬라어 원어도 한글 번역과 동일한 의미이며, 악한 종이 주변의 신실한 종들을 핍박하고 때린다는 것은 실제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장 많이 괴롭히고 방해하는 인물들은 바로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나,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다른 교인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나 집에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하여 상처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 신앙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판단기준과 비교 대상은 다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과 비교하여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음을 경험해야 한다.

 

③ 악한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σκληρός ἄνθρωπος(스클레로스 안드로포스; 4642, 444)"; 즉, "거친, 무자비한, 혹독한, 엄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악한 종은 주인의 말씀과 명령을 "고생만시키고, 어려움만 주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이 악한 종이 주인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잘못 가지게 된 이유는 바로 탕자가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이유와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생각이 한때는 하늘나라의 빛나는 천사장이었던 루스벨; 즉, 사탄이 지구 역사 수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의 마음 속에 심었던 생각이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은 어려운 것이며, 절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써, 첫째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그대로 다시 경험하시고, 또한 결국 모든 부분에서 승리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율법이 곧 사랑인 사실을 온 우주에 증거하셨다.

 

④ 악한 종의 생각은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의 탕자의 생각과 같다. 탕자는 아버지의 제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이 망나니 둘째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많이 오해했으며, 결국, 자기의 기분을 따라 이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탕자는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감사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아들로써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특권 만을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당장 받기 원했다. 그는 현재의 쾌락을 누리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성경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롬1:22)"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이 바로 탕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