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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비유 - final part (탕자의 비유의 교훈) 본문

parables of Jesus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 - final part (탕자의 비유의 교훈)

BibleMotivation 2023. 10. 1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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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하늘은 회개하는 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작하는 말

지난 「탕자의 비유」 연구 시리즈의 여섯 번째 글에서는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변인물들 중에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아버지 집의 종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며,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특징과 차이점을 알아보았다. 

 

지난 연구의 중심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면서, "품꾼; 즉, 삯꾼"으로 받아달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이라고 고백한다. 탕자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사용한 "품꾼"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어원과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삯꾼"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어원은 동일하게 "μισθός(미스도스; 3408)"이며, 이 단어의 의미는 "품삯, 보응, 삯, 보상, 보수"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탕자가 지금껏 몰랐던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정확하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탕자가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깨닫고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올바르게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 집의 종들은 삯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의 명령을 듣고 실천하는 충실한 종들이었으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종들이었고, 다시 돌아온 주인의 둘째 아들인 탕자와 주인과 함께 먹고 즐긴 종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첫째 아들에게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좋은 소식을 경험한 그대로 충실하게 증거한 종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과 25장 속의 비유들 속에 나타난 악한 종들; 즉, 예수님의 재림을 눈앞에 둔 현재 시대에 교회 속에 존재하는 어리석고 불충성된 종들은 "주인(예수님)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변의 다른 신실한 종들을 괴롭히고 때리며, 나쁜 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또한, 악한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 즉, 거칠고, 무자비하며, 혹독하고, 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악한 종은 주인의 말씀과 명령을 고생만시키고, 어려움만 주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이러한 잘못된 사상은 바로 한때는 하늘나라의 빛나는 천사장이었던 루스벨; 즉, 사탄이 지구 역사 수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의 마음 속에 심었던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바로 탕자가 자신의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아버지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과 동일하다.

 

 현재,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성경책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과 십계명을 오해하고 있거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로 바뀌거나 수정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시각은 예수님의 초림의 목적,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에 나타난 진리,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팔복을 선포하시면서, 명확하게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은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음을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장 17~20절). 또한, 성경은 분명히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써, 첫째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그대로 다시 경험하시고, 또한 결국 모든 부분에서 승리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율법(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 곧 사랑인 사실을 온 우주에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이러한 기초적인 진리의 기준점이 아예 잘못 이해되어 버리면, 그 이후에는 자꾸 무언가 어긋나는 해석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판단기준과 비교 대상은 다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과 비교하여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탕자의 비유」 연구 시리즈의 마지막 글에서는 비유 바깥의 인물들을 살펴보며, 이 비유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교훈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할 것이다.

 


비유 바깥의 인물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 곁에는 여러 부류의 청중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은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누가복음 15장 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위의 성경절에서 드러나 있듯이, 일차적인 청중들은 바로 세리와 죄인들이었으며, 이것은 당시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구분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청중들 사이사이에 예수님을 정탐하려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하나의 오류라도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끼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자와 후자의 행동과 태도의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 세리와 죄인들의 행동과 태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만들어 낸 기준으로 선을 긋고 죄인으로 정해버린 부류의 사람들은 당시의 세리들,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실제로 당시 유대의 법을 어겨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그리고 유대의 법에 따라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창기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통칭하여 "죄인들"이라고 한 단어로 묶어서 부르고 있었으며,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첫번째 청중들은 바로 이렇게 "세리와 죄인들"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좀 더 잘 듣기 위하여, 예수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 유대의 지도자들의 행동과 태도

반면에,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수많은 청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에 대하여 질투심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1, 참조; 눅15:2)”고 물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과 질투어린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러한 비난에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직접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9장 12~13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예수님 당시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신앙 상태

  •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대표로 하는 거의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영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에 치료받을 의사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자신들이 죄인으로 지정해 놓은 세리들과 이방인들, 및 병자들과 사회의 최약 계층은 영혼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어간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였을지라도, 이미 예수님께서 수없이 지적하신 것처럼, 사실은 그들이 멸시하던 세리와 죄인들보다도 훨씬 더 심한 죄악의 중병에 걸린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하여, 세리들은 고집과 자부심이 덜했으므로, 진리의 감화에는 마음 문이 훨씬 더 열려 있었다. 예수께서는 랍비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남들에게 가르친다고 주장하면서도 진정한 성경말씀의 정신에는 전혀 무지하다는 것을 계속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이 조롱하고 멸시하시를 좋아하는 지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권고를 거절하였으며, 오히려 침례요한이나 예수님이 사귀에 들렸다고 주장했다.
  •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백성들과 섞여서 그들의 식탁에서 식사하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진리의 빛을 주시기 위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잡수시고 계신 것을 고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사람의 마음밭에 심겨지고, 싹이 터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를 맺을 살아있는 씨앗인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생각이 들 때, 예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유전을 지키기로 더 굳게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고대의 유전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 역사는 반복되며, 이러한 일은 지금도 현재에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사탄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변치않는 사랑의 율법을 사람들에게 잘못 나타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사탄 자신의 속성을 가지신 분으로 완전히 오해할 수 있도록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설교자들을 통하여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시켜 온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사탄의 유혹에 빠진 당시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야의 왕국에 관한 구약의 선지자들의 교훈을 연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진실된 소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야심과 욕심을 뒷받침해 줄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연구한 것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이 세상의 메시야로써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며, 그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기만자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힘썼던 것이다.

 

  • 유대의 지도자들은 영적인 자만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그들의 욕망은 성전 봉사에서까지도 드러났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들의 칭호가 불려지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참된 경건이 쇠퇴함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유전과 의식을 더 엄하게 수호했다. 이기적인 편견으로 말미암아 이해력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깨닫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을 그의 생애의 겸비함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 또한, 당시의 유대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과 모본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백성들은, 행복은 이 세상의 재물을 소유하는 데 있고 사람의 명성과 명예는 매우 탐낼 만한 것이라 생각해 왔던 것인데, 이러한 이유는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우고, 대중들 앞에서 저희 선행을 자랑해 보임으로 슬기롭고 경건하다는 칭찬을 받는 것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며, 행복의 극치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유대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 그러나, 이러한 유대의 지도자들의 외식적인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누가복음 5장 37절)”고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던 가죽 부대는 얼마 후에는 말라 부숴지기 쉽게 된다. 그래서, 다시 포도주를 넣는데 쓸모가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상태를 이러한 낡은 가죽 부대의 예시로 나타내셨다.
  •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관원들(바리새인, 사두개인)은 너무나 종교적 의식과 유전의 틀에 고착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교훈을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 현명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기엔 너무 의로우며,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존귀함을 필요로 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진리의 기별을 듣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기 위하여 그들로부터 돌아서셨다. 
  • 대신, 예수님께서는 무식한 어부와 장터에 앉은 세리와 사마리아 여인과 당신의 말씀을 기쁘게 듣는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발견하셨다. 복음 사업에 쓰이는 도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빛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런 영혼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진리의 경험적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가죽 부대가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새 포도주로 우리를 반드시 채워주실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읽는 현재의 나 그리스도인들과 나 자신

「탕자의 비유」 바깥의 인물들 중에서는 당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 곁에서 비유를 들었던 청중들이 있었던 반면에, 성경말씀을 통하여 현재 이 비유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 변화되기 이전의 탕자의 상태 

  •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갈 당시의 탕자는 자기의 아버지를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교훈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의 인생을 살 목적으로 집을 떠났던 이 탕자는 결국 아버지의 교훈 속; 즉, 진리 속에 참된 자유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제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 이와같이,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임을 당하여 하나님을 가혹하고 각박한 분으로 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치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어떤 꼬투리를 잡으려는 분으로 보며, 그들을 도와주실 어떤 이유가 없는 한 죄인을 받아주려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도 역시 저희를 정죄하는 하나의 도구로만 여기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그것을 벗어던지면 좋을 무거운 멍에로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은 폐하지도 않고, 폐할 수도 없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으로써 율법 아래 오셔서 직접 십계명을 실천하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죄없는 자신을 인간의 죄의 대속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로움과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하신 것이다.(참조 - 갈라디아서 4장 4절; 마태복음 5장 17~20절)
  •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을 긍휼과 은혜가 충만한 분인 것을 경험하며, 또한 그분의 율법이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전제적이고 무자비한 분이 아니시며, 오직 회개하는 당신의 자녀를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사랑의 아버지로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되게 될 것이다. 

[시편 103편 13절]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 탕자의 변화를 이끌어 낸 끊임없는 아버지의 사랑

  • 탕자의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드러내어 견책하거나 꾸짖는 장면이 전혀 없다. 대신, 탕자는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을 받고 잊어버린 바 되었으며 영원히 그의 죄가 도말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모든 죄인들에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사44:2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렘50:20)라고 말씀하신다.

 

  •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모든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이 사실은 탕자의 비유의 핵심기별이다.
  • 우리는 지금껏, 아니, 지금도 어느 정도 세상과 타협하며, 우리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길을 발견하고자 한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도와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또한 그렇게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그분이 주신 재능을 나의 욕심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 우리를 목숨바쳐 사랑하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사44:22)다고 초청하신다.

 

  • 우리는 '너희 자신을 스스로 개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 될 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이 될 때까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속이는 사탄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때까지 기다린다면 우리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절대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할 수 없다! 
  • 사탄이 그대의 더러운 죄의 옷을 가리키며 그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다고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그러한 사탄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해야 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멀리까지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아무리 은밀하게 고통의 눈물을 흘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시는 때는 없다. 우리의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사랑과 은혜가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마중하기 위하여 벌써 나와 계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옷을 벗기시고 새로운 의의 옷으로 입히실 것이다. 

[스가랴 3장 1~5절]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이사야 62장 5절; 스바냐 3장 17절]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누가복음 15장 22~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아버지의 첫째 아들을 통한 교훈

  • 탕자의 비유의 기쁜 회심과 재회의 장면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전혀 성질이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신다. 바로, 탕자의 형인 아버지의 첫째 아들의 이야기이다.
  • 이 첫째 아들은 자기의 동생인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눅15:28)였다. 이 형은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자기 아버지의 염려와 걱정을 나누지도 아니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잃어버렸던 동생이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하여 기뻐할 때에 그는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지 못했으며, 그렇게 기뻐하기로 선택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온 집안이 기뻐하는 잔치의 노래 소리는 이 첫째 아들의 마음에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도 못했다.
  • 첫째 아들은 다시 돌아온 그의 동생을 몹시 질투하였으며, 그의 질투는 결과적으로 그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의 몰골을 하고 다시 돌아온 자신의 동생을 잘 대해주는 것은 곧 자기를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께서 그를 달랠 때에, 이 첫째 아들의 교만과 악의가 드러났다. 그는 스스로를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한 사람의 삯꾼으로 표현했으며, 자기 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을 보수도 없이 일한 봉사의 쳇바퀴 생활로 치부했다. 이러한 첫째 아들의 표현은 그의 평생의 봉사가 아버지의 아들로써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종으로써의 봉사였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냈는데, 특히, 그가 탕자를 지칭할 때, '자기의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냉정하게 “이 아들”(눅15:30)이라고 말한데서 드러난다.
  • 이러한 첫째 아들의 신앙상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삭의 첫째 아들이었던 "에서"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장자의 권리"를 대했던 태도와 비교할 수 있다. 에서가 "장자의 권리"를 통하여 가장 최우선적 목표로 삼았던 것은 바로 아버지의 재산과 대가족을 이끄는 족장으로써 그가 속한 사회에 드러낼 명예였다. 에서는 동생 야곱이 원했었던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의 혈통을 잇는 조상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왕이 되기를 원했으며, 미래에 영원히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의 일원이 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 탕자의 형인 이 첫째 아들은 자기의 비열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정신을 깨달았을까? 그는 자기 동생이 비록 방탕했을지라도 역시 자기의 동생이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그는 과연 자기의 시기심과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였을까? 이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 비유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며, 그 결과를 비유를 읽는 독자들의 경험을 통한 판단에 맡기고 있을 뿐이다.

「탕자의 비유」 연구를 마치면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을 업신여기던 그리스도 당시의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과 각 시대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저희 자신이 그다지 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유대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입장에서 반박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집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은 삯꾼의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에 근거해서 일하지 아니하고 보수를 받을 생각으로 일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시각을 '하나님께서는 혹독하게 일을 시키는 주인과 같다'고 바라보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거룩하게 보이려는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을 일반 대중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마치 애굽의 바로 왕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걍팍하게 만들어 버렸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그저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구원을 마치 탕자처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냉정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보게 만들어 버린다.

첫째 아들은 이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의 동생의 모든 행동을 비판하고 작은 결점에 대해서도 비닌하려고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동생의 잘못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변명하려 했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한 그리스도인이 홍수같이 밀려오는 매일의 시험에 맞서 싸우기를 시작하면, 탕자의 형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곁에서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불평하고, 비판적는 태도로 방관만 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정신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계속 가까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는 이기심의 얼음이 녹아 내리게 되어 하나님과 같은 깊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은 자가 우리의 “동생”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탕자들을 받아들이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진정으로 예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일서 4장 8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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